HOME  >  마미유학센터카페

마미유학센터카페

그녀의 치유일기
작성자 : 관리자(visualcanada@naver.com)   작성일 : 23.02.21   조회수 : 121

 

그녀는 가난한 목사님의 딸이었다.

 

가난한 집안의 딸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그녀도 한 푼이라도 벌어 생활에 보탬이 되기 위해

일찌감치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여자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여상을 졸업하고 아버지가 잘 아는 목사님의 교회에 사무직원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돈이 없다는 말을 늘 달고 사시던 어머니께 

몇 푼의 월급을 꼬박꼬박 가져다 드리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던 그녀였다.

어느 날인가부터 그 목사님의 행동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목사님의 불편한 행동이 딸 같은 친근함의 표현인지 무엇인지

그녀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부모님께 말씀드려야 할 것만 같았고

나중에 부모님을 통해서 그 불편한 감정이 성추행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아버지가 주선해서 다니게 된 직장에서 벌어진 일로

그 목사님의 멱살을 잡는 대신 그녀에게 창피하다고 역정을 내셨고

어머니는 그녀가 아닌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심기를 거슬리지 않으려 애를 쓰셨다.

누구도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졸지에 행동거지를 제대로 하지 못한 부끄러운 딸이 되어 버린 그녀는

거의 집 밖에 나갈 수도 없었고 버스를 탈 돈조차도 없었다.

하루 종일 집에 있다 정 답답하면 동네를 순환하던 백화점 셔틀버스를 타고

잠깐 바깥 공기를 쐬고 오곤 할 뿐이었다.

아버지는 그 목사님을 몇 번 만나러 다니시더니 뭐가 잘 안되었는지

소송을 하셨고 여차저차 하여 몇천만 원의 합의금을 받으셨다.

그녀는 집안의 눈총 거리로 숨죽이고 지내면서도

그 합의금이 가난한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었을 거라 스스로 위안했다.

 

 

어느 날부터 아버지는 캐나다에 계신 다른 목사님과 

몇 차례 통화를 하시고 그녀에게 짐을 싸게 하셨다.

그 목사님이 자신이 딸처럼 데리고 있으면서 영어도 가르치고

일자리도 알아봐 줄 테니 캐나다로 보내라 하셨단다.

난생처음 외국이라는 곳에 오게 된 그녀는 아버지가 

그녀를 데려다 놓고 한국으로 돌아가 버린 그날부터

그 목사님의 와이셔츠를 빨고 집안일을 하는 신세가 되었다.

하숙비라도 받을 요량으로 딸을 보내라던 목사님은

부끄러운 딸을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게 목적이었던 아버지로부터 

하숙비를 받지 못하자 돈 대신 몸으로 때우게 하셨다.

 

그녀가 어렸을 때 집안이 폭삭 망했고

부모님은 어린 자녀 4명을 할머니 댁에 두고 야반도주하였다.

캄캄한 밤에 소리를 죽여가며 부모님이 짐보따리를 들고 방을 나서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떠나는 엄마를 일어나서 붙잡지도, 울지도 못했던 그날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할머니는 4명의 손주를 키우기 위해 손바닥만 한 텃밭에서

야채를 한 줌씩 뜯어 가지곤 8명의 고모들 집에 마실을 다니셨다.

고모들은 돌아가는 할머니에게 몇만 원씩을 쥐여주곤 했고

그것으로 그나마 할머니는 손주들 밥을 먹일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딸네 집에 동냥하러 다닌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지만

할머니로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8명의 고모를 낳은 후 어렵게 얻은 아들인 아버지는

쭈그러진 몸뚱이만 남은 늙은 할머니에게 4명의 어린것들을 버려 두고 나갔고

그런 당신의 팔자가 서러웠는지 딸네집에 다녀오신 날은

여지없이 대문 앞에 앉아 한바탕 통곡을 하시고 집에 들어오시곤 하셨다.

그렇게 아들이 버린 손주들을 거두어 주셨던 할머니는 

위암으로 고생하시다가 박복한 삶을 마감하셨다.

 

그렇게 수년이 흐른 후 다시 합치게 된 가족이었다.

성추행당했던 그녀를 보호해주는 대신 부끄럽게 여기고 낯선 이국땅에 버리다시피 했으며

혼수를 하나도 못 해왔다고 첫 번째 남편에게서 맨몸으로 쫓겨났을 때도,

두 번째 남편을 만나 4명의 아이를 낳았을 때도,

교통사고로 몇 년을 고통 속에 헤맸을 때도 괜찮냐, 잘살고 있냐,

아프지는 않냐고 걱정해주지 않았던 부모님이 못내 

서운하고 밉고 용서가 안 된다고 그녀는 여러 번 울었다.

그녀의 상처가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꾸만 발목을 잡는다고 괴로워했다.

그리고 부모라면 당연히 자식을 걱정하고 보호하고 끝까지 지켜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맞다. 부모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오늘은 그녀가 발렌타인데이에 아이들에게 손수 만들어 주었다던 딸기 생크림 케이크 사진을 보내왔다.

당연한엄마 역할로 분주한 그녀에게 토닥토닥 응원의 하트를 날려 보냈다.

 

 

 

Mommy-투명화X.jpg

 

 

 

 

이전글
다음글 턱없는 인프라 부족 - 발달장애가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장애